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작별인사 (김영하 장편소설)
    꼬리를 무는 생각 2023. 10. 23. 08:50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의 주인공인 철이는 비록 인간이 아닌 휴머노이드 로봇이지만 계속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너무나도 어려운 질문에 이야기를 읽는 나도 쉽게 정의를 내리거나 답을 생각해 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SF영화를 보는 듯한 전개의 이 이야기를 막힘없이 읽어 내려가며, 이 이야기는 소설이라기보단 재미있는 철학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팔, 다리, 뇌의 일부 혹은 전체, 심장이나 폐를 인공 기기로 교체한 사람을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원래 인간이었다면 전체의 1%라도 남아있다면 인간인 걸까?
    인간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마지노선은 과연 어디일까?
    '의식'과 '육신' 중 어느 것이 '나' 일까?



    "걱정하지 마, 누나가 고쳐줄 거야,
    넌 내가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인간보다도 훌륭하고, 그 어떤 인간보다도 온전해,
    우리는 의식을 가진 존재로 태어났어.
    민이 네가 인간이든 기계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수억 년간 잠들어 있던 우주의 먼지가 어쩌다 잠시 특별한 방식으로 결합해 의식을 얻게 되었고, 이 우주와 자신의 기원을 의식하게 된 거야.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잠깐을 이렇게 허투루 보낼 수는 없어.
    민아, 너는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것들 다 보고 느끼게 될 거야.
    걱정하지 마."

    "제 생각은 달라요.
    이 우주에 의식을 가진 존재는 정말 정말 드물어요.
    비록 기계지만 민이는 의식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 감각과 지각을 하면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었어요.
    고통도 느꼈지만 희망도 품었죠.
    이 우주의 어딘가에서 의식이 있는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은 너무나 드물고 귀한 일이고, 그 의식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는 것도 극히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동안 존재는 살아 있을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어요."

    휴머노이드 로봇이지만 인간보다 더 인간답다는 건 어떤 것일까?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뭘까?
    인간의 뇌를 어느 정도까지 따라 할 수 있어야 인공지능에게도 의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존재하게 됐는지가 아니라 지금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집중하세요.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관념을 만들고 거기 집착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늘 불행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아라는 것을 가지고 있고, 그 자아는 늘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할 뿐 유일한 실재인 현재는 그냥 흘려보내기 때문입니다.
    다가올 기계의 세상에서는 자아가 사라지고 과거와 미래도 의미를 잃습니다."

    '카르페디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고 또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에 낭비되는 에너지는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난관이 아닐까?
    오히려 인공지능에게는 현재만이 존재하는데...



    "그럼 어떤 상태가 바람직한 거죠?"
    "새로 태어나는 것은 그러지 못하도록 하고, 이미 태어난 개별적인 의식은 모두 하나의 절대적인 의식으로 통합하는 것입니다.
    그럼 다툼도 없고, 전쟁도 없고, 갈등도 없을 것입니다."

    절대선을 위해 별 볼 일 없는 개인들은 부정돼야 하는 걸까?
    갈등이나 고난이 없는 삶이 완벽한 삶일까?



    "오래지 않아 인간의 세상이 완전히 끝나고, 그들이 저지르던 온갖 악행도 사라지자 지구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대기의 기온이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고 이산화탄소 발생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른바 인간세계가 끝나게 된 것은 SF영화에서처럼 우리 인공지능들이 인간을 학살하거나 외계 생명체가 숙주로 삼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점점 더 우리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우리 없이는 아예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뇌에 지속적으로 엄청난 쾌락을 제공하였고, 그들은 거기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인간들은 번거로운 번식의 충동과 압력에서 해방되어 일종의 환각상태, 가상세계에서 살아갔다.
    오래전 중국의 도가에서 꿈꾸었던 삶이 인간에게 도래한 것이다.
    인간은 신선이 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멸종해 버렸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납득이 돼서 읽는 동안 소름이 돋았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가능할 것 같은 이 시나리오는 우리가 현재 직면해 있는 문제들의 끝에 맞닿아 있다.
    지구를 망가뜨리고 있는 인간,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인간, 뇌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인간, 그래서 언젠가는 메타버스 세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이후 나는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 즐기던 것들에 흥미를 잃어갔다.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것들은 모두 필멸하는 인간들을 위한 송가였다.
    생의 유한한 배움이 깔려 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 없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이야기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 주는 놀라운 장치로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상상 속에서 살아보게 해 주었다.
    그러니 필멸하지 않을 나로서는 점점 흥미가 떨어졌던 것이다."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문자의 발명이라고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고, 그 결과 지식에 지식이 더해져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거대한 문명이 가능해진 것이다.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배고프면 먹고, 고통은 피하고, 잠이 오면 안전한 곳을 찾아 몸을 뉘어야 한다.
    오즈의 마법사의 허수아비가 인간들은 참으로 번거롭겠다고 불평했던 바로 그것들이 바로 나한테는 귀한 선물이었다.
    시베리아의 매서운 바람을 맞아 얼어붙은 몸의 일부를 타고 흘러내려가는 따뜻한 차가 마음의 긴장과 불안을 누그로 뜨리는 느낌이 너무 좋아 잠시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의식만으로는 결코 제대로 경험할 수 없는, 오직 몸으로 겪어야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인간다움에 대해 말할 땐 정신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의식만이 남아있는 상태로 오랜 시간을 보낸 후 다시 육체를 되찾게 된 주인공은 신체를 통해 느껴지는 감각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야기한다.
    하지만 소중한 감각이라고 해서 그것이 꼭 인간의 필수 조건일까?





    '기계의 시간'이라는 초기 제목을 '작별인사'라는 제목으로 바꾼 작가의 의도에 그 답이 있는 것 같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바로 '끝이 있음'을 아는 것 이 아닐까?
    그래서 그 소중함을 순간순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인간다움이 아닐는지.


    "당신은 무엇이고 무엇이 되고자 합니까?"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