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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스쳐 지나간 후 남은 것들미국에서 1년 살기 2024. 1. 2. 08:50
금요일부터 날이 흐려지고 비가 오는 게 토요일로 넘어가는 밤 사이에 가장 강력한 태풍영향권에 들어갈 것 같았다. 뉴스를 보니 이미 태풍이 지나간 플로리다주 근처의 해안가들은 집들이 물에 잠기거나 부서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점점 거세지는 바람소리가 심상치 않아 부디 무사히 지나갈 수 있길, 주차장에 세워둔 우리 차에 아무 일도 없길 기도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밤새 비 내리는 소리에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었는데, 새벽녘에 화장실 변기에서 꿀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확인해 보려고 일어나 화장실 스위치를 올렸는데 불이 들어오지 않는 게 정전인 것 같았다. 아직 해뜨기 전이라 어두운 게 맞지만 왠지 평소보다 더 어두운 것 같아 창밖을 내다보니 도로의 가로등이 모두 꺼져있어 칠흑같이 깜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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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케인이 온다고요?미국에서 1년 살기 2023. 12. 27. 08:50
TV가 없어서 뉴스도 안 보고 지내던 어느 날, 워싱턴에 사는 SJ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주말에 거기 비 많이 올 거라는데, 대비를 좀 해 놔야 할 거야." 노트북으로 CNN 뉴스를 찾아보니 초강력 허리케인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근데 무슨 대비를 어떻게 해야 해요?" "물 같은 거 미리 사다 두고, 수도가 끊길 수도 있으니까 욕조에도 물을 좀 받아두면 좋아. 전기가 끊길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파워뱅크 같은 대용량 배터리를 사는 건 좀 그렇고... 그리고 차도 나무 옆에는 세우지 말고 가능하면 차고에 넣어둬." "우린 차고 같은 거 없는데..." 도대체 얼마나 강력한 허리케인이 길레 수도와 전기가 끊기고 나무가 쓰러진다는 거지? 영화에서나 보던 그 빙글 뱅글 돌아가는 그런 토네이도가 지나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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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L 수업이 시작되었다.미국에서 1년 살기 2023. 12. 22. 08:50
수능모드로 너무 각 잡고 레벨테스트를 본 탓에 무료 ESL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위대한 한국식 암기교육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어쩐지 시험 보기 전에 가볍게 인사 나누던 옆자리의 아가씨와 앞자리의 아저씨는 인사 외에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을 정도로 영어를 못하는 듯했다. 무료과정을 놓친 건 아쉽지만 어차피 배울 거 돈 내고 배우면 더 열심히 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고 컬리지의 ESL 수업을 등록했다. 한 반에는 10명 정도의 학생이 있었다. 첫 시간에는 둥글게 둘러앉아 자기소개를 했는데, 같은 국적이 하나도 없이 떠듬떠듬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는 모습이 마치 전현무가 진행하던 JTBC 예능인 '비정상회담'을 촬영하고 있는 듯해서 자꾸 웃음이 났다. 유일하게 같은 국적인 내 또래의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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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산타클로스미국에서 1년 살기 2023. 12. 21. 08:50
"오랜만에 감성 돋는 손 편지 한번 써볼 테니 주소 좀 알려줘 봐." "훗, 카톡으로 대화하고 있으면서 무슨 편지? 너 설마 미국에 올 일 있어?" 카카오스토리에 올린 우리의 눈물겨운 좌충우돌 정착기에 친구들의 열렬한 응원이 이어졌다. 그중 한 친구가 카톡으로 우리 집 주소를 물었다. 옛날 옛적에 유학하던 시절이 생각나서 그러나? 싶어 우리 집에 놀러 오려는 거냐 농담하며 주소를 알려줬다. 워싱턴 D.C. 에 다녀온 뒤 며칠이 지나자 커다란 택배가 도착했다. 워낙 아마존에서 이것저것 주문한 터라 하루가 멀다 하고 택배기사가 우리 집 앞에 박스를 던져놓고 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번엔 내려놓는 소리 자체가 달랐다. 그 둔탁하고도 바닥을 울리는 소리에 층 전체가 흔들린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뭐지? 현관문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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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체험학습인가요? 여행인가요? - 워싱턴D.C. 여행기미국에서 1년 살기 2023. 12. 20. 08:50
금요일 오후, 모두의 수업이 끝나고 나의 ESL 레벨테스트까지 마친 후 우리는 곧바로 워싱턴으로 출발했다. 노동절인 월요일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연휴라 3박 4일의 워싱턴 여행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5시간 정도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고도 남았는데, 미국에 오니 2~3시간 정도는 가볍게 마트에 다녀오거나 외식을 하고 돌아오는 거리가 되었다. 한 달 동안 매일 여기저기 운전을 하며 다녔기 때문에 새 차엔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이렇게 주 경계 너머까지 멀리 이동하는 건 처음이라 살짝 긴장이 돼서 미리 지도를 보며 대략적인 길을 익혔다. 미국에 와서 우리가 사용하는 내비게이션은 Waze라는 애플리케이션이었는데, 처음엔 영어로 나오는 안내들이 귀에 익지 않아 화면의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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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상이 시작되었다.미국에서 1년 살기 2023. 12. 15. 09:07
미국에 온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지나고 났으니 '벌써'라고 여유를 부려보지만, 하루하루가 굉장히 바빴던 한 달이었다. 그동안 간간히 중고물품들을 구매해서 이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웬만큼 다 갖춰진 것 같다. 중고거래 덕분에 드라이브 아닌 드라이브를 실컷 하다 보니 집 근처나 조금 멀리 떨어진 지역들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정말 여러 형태의 집들과 동네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비록 중고지만 나는 처음 쓰는 것들이니까 왠지 새살림을 장만하는 듯한 재미도 있었고, 이제야 집에서 안정감이 느껴졌다. 아파트 1층인 우리 집은 북서향이었다. 남쪽으로는 창이 전혀 없고 모든 방과 거실의 창이 북쪽으로 나 있는 집은 한국에서 무더위를 보내다 온 우리에게 천국이었다. 캐리의 기후 자체가 제주도 정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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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 - 첫 번째 이야기미국에서 1년 살기 2023. 12. 14. 09:44
"너희 Raleigh에 왔어?" 카카오스토리에 올린 미국 공항 도착사진에 MS언니의 댓글이 달렸다. MS언니는 나의 첫 직장동기인 MK언니의 친언니로 MK언니의 미니홈피에서 댓글로 시작된 인연이 카카오스토리로 이어져 지금까지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모습을 공유해 왔다. 지난 10년간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는 언니가 NC에 살고 있었다. 그것도 우리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언니가 미국에 살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미국에 산다고 하면 막연하게 LA나 뉴저지 근처에 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뜬금없는 우연은 어쩌면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꼭 만나야 하는 인연. 언니는 얼마 전까지 뢀리에 살다가 여기서 한 시간 반쯤 걸리는 Greensboro로 이사 갔다며 시차가 적응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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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아파트 맥가이버 아저씨미국에서 1년 살기 2023. 12. 12. 08:50
욕실 천장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길래 오피스에 얘기했더니 맥가이버 아저씨가 왔다. 한 달 사이에 이 아저씨를 벌써 서너 번은 본 듯하다. 무슨 새집에 입주한 것도 아닌데, 하자보수가 이렇게 많은지... 부엌등 전구가 나가서 부르고, 모기장같이 생긴 전기레인지가 고장 나서 부르고, 이번엔 욕실 천장까지 말썽이다. 뭐든 뚝딱뚝딱 고쳐주는 건 좋은데 항상 워커를 신은 채로 저벅저벅 거침없이 들어와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때문에 아저씨가 왔다간 후엔 온 바닥을 쓸고 닦아야 했다. 전등을 갈아주러 처음 우리 집에 방문한 날, 아저씨는 집에 들어오기 전에 신발을 벗어야 하냐고 물었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끈 달린 워커를 신고 있어서 차마 벗어달라는 말을 못 했는데, 그 후론 묻지도 않고 신발을 신은 채로 그냥 들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