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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잘하지만 못해요.미국에서 1년 살기 2023. 11. 23. 08:50
대한항공을 타고 아틀랜타에서 내려 델타항공으로 경유하기 위해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입국심사가 길어지면 비행기를 놓칠까 봐 시간을 넉넉하게 잡았는데, 생각보다 금방 끝난 입국심사 덕분에 대기시간만 늘어났다.
지난밤을 짐 싸느라 꼴딱 새워 가뜩이나 멍한 상태의 나에겐 웅웅대는 사람들의 소리나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안내방송이 백색소음 같았다.
그저 내가 미국에 와 있다는 걸 실감 나게 해 줄 뿐이었다.
긴 기다림에 지친 아이들이 몸을 배배 꼬기 시작해서 뭐라도 좀 사 먹으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드디어 실전영어 1탄이 시작되었다.
주문을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며 아이들이 먹고 싶다는 걸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샌드위치 하나, 햄버거 하나, 콜라 하나, 오렌지주스 하나.'
"May I take your order?"
"Yes, I'd like one sandwich, one hamburger, one coke, and one orange juice, please."
옆에 서 있는 아이들의 눈빛에 놀라움과 존경이 가득했다.
"와, 엄마 영어 잘한다."
내심 뿌듯해하며 아이들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때 점원이 다시 말했다.
너무 빨리 얘기해서 정확히 뭐라고 말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포장해 갈건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Yes."
"Is that for to go?"
"Oh, no. For here."
점원의 눈빛은 마치 "뭐 어쩌겠단 거야..." 하는 듯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내가 뭘 잘못 얘기한 거지?'
음식을 받아 들고 테이블에 앉아 아이들이 먹는 모습을 보며 주문할 당시의 상황을 다시 생각해 봤다.
점원이 포장해 갈 건 아니지?라고 물었을 때 나는 한국식으로 '그렇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미국식으로는 '아니.'라고 대답했어야 포장을 안 해갈 거라는 뜻인데, 나는 처음엔 포장해 간다고 대답했다가 나중엔 먹고 간다고 했으니...
머릿속에 '부정의문문에 대답할 때는...'이라는 문법책 챕터가 떠올랐다.
역시 책으로 배운 영어는 실전에 약하다.
미국에 도착해서 첫 일주일은 온갖 계약서와 등록의 연속이었다.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혀있는 계약서가 몇 장이라도 단 몇 문장의 대화보다는 훨씬 편했다.
미국통신사의 전화를 개통한 후에는 수많은 광고전화들이 오기 시작했는데, 전화를 받을 때마다 혹시 중요한 내용인가 싶어 남편과 함께 스피커폰으로 들으며 마치 듣기 평가에 임하는 듯 머리를 맞대고 풀어나갔다.
결국 중요한 내용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점점 영어로 걸려오는 전화에 무뎌졌고 광고성 전화도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전화영어는 가장 어렵고 두렵다.
아이들과 남편의 등교가 시작되며 나의 일과는 식사준비와 운전 외에는 별다른 게 없었다.
아이들 등교 후 남편을 학교에 내려주고 나면 주변 도서관이나 마트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데리러 가고 하다 보니 한국에서도 안 하던 라이드를 하고 있는 나의 모습에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다들 뭔가를 배우고 돌아갈 텐데, 나는 일 년 내내 이렇게 집밥하고 운전만 하다 돌아가는 건가?'
나도 뭔가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져서 ESL 수업 과정을 본격적으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남편을 학교에 데려다주는 김에 나도 수업을 들으면 좋을 것 같아서 UNC 부설 과정을 알아봤지만 J2비자를 위한 수업은 별로 없었다.그나마 있는 한두 개의 수업은 장소가 멀고 찾아가기 애매하거나 수업 커리큘럼이 너무 부실했다.
무료인 수업들을 알아보다가 근처 컬리지에서 들을 수 있는 ESL이 괜찮아 보여 레벨테스트를 신청하려고 하니 이미 한번 테스트가 끝났고 금요일의 추가 테스트가 등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금토일과 휴일인 월요일까지 해서 워싱턴에 다녀오려던 계획이었지만, 출발 시간을 늦추고 레벨테스트를 보러 갔다.
요 몇 달 동안 아파트 계약서며 아이들 학교 공문, 보험약관, 자동차 계약서, 은행약관 등 정말 토 나올 정도의 영어 문서를 읽어댄 탓인지 레벨테스트는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마치 토플 시험을 보듯 온 신경을 집중해서 풀고 제일 먼저 답안지를 제출했는데, 바로 채점을 하던 감독관이 내 이름을 호명했다.
시험지를 가지고 나가서 벽에 붙은 화살표를 따라가면 나오는 사무실로 가보라고 해서 열심히 찾아갔더니 데스크에 앉은 담당 직원이 내 시험지를 보며 하는 말이, 나는 시험을 잘 봐서 무료 과정 수업을 들을 자격이 없다는 거였다.
이런...
시험을 못 봐서 떨어지는 레벨테스트는 봤어도, 너무 잘 봐서 떨어지는 레테라니...
그럼 난 수업을 들을 수 없냐고 물었더니, 자기네 컬리지에 다니는 대학생들을 위한 ESL과정이 따로 있는데, 그건 한 학기 과정이고 따로 수업료가 있는 유료 과정이라는 것이다.
무료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유료 수업이라니 당황해서, "나는 읽고 쓰는 것만 잘한다. 알아듣는 건 겨우 조금 알아듣고 말하는 건 정말 못한다. 그러니까 무료 ESL 수업을 듣게 해 주면 안 되겠냐."라고 부탁하자 담당자는, "여기 오는 한국인들은 다 그렇게 말하더라. 하지만 우리 학교 방침상 그건 안된다. 무료 ESL은 정말 간단한 일상생활조차 불가능한 이민자들을 위한 과정이다." 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
결국 좀 더 생각해 보고 신청하겠다고 말하고 사무실을 나왔다.남편과 통화하느라 복도에 서 있었는데 나 다음으로 들어간 (딱 봐도 한국 사람 같았던) 사람이 하는 대화가 들려왔다.
"난 영어 잘 못해요. 읽는 것만 좀 하는 거예요."
이런...... 텍스트에만 강한 한국인들 같으니라고.'미국에서 1년 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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