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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부림의 현장에서 삼시세끼의 기록미국에서 1년 살기 2024. 1. 4. 08:50
맛집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거, 더 새로운 거에 열광하던 식도락이 불가능해졌다.
집 주변에 어떤 음식점이 있는지, 아니 도대체 음식점이 있긴 한건지조차 파악이 안 되니 외식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그나마 구글 평가가 좋거나 ESL친구들에게 추천받은 음식점 몇 곳에 가봤지만 우리가 원하는 맛은 아니었다.
게다가 처음 겪어보는 팁 문화는 가뜩이나 비싼듯한 음식값을 더욱 부풀리는 듯해서 괜히 기분이 나쁘고 적응이 안 됐다.
차라리 먹고 싶은 건 만들어먹자는 생각에 본격적인 삼시세끼 집밥 생활이 시작됐다.
카카오스토리 기록용으로 찍기 시작한 집밥 사진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왜 자꾸 밥 먹기 전에 사진 찍냐고 묻던 아이들은 어느새 적응이 돼서 말 안 해도 내가 사진 찍기 전까지 먹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머쓱한 마음에 "나중엔 이런 게 다 추억이야."라고 한 얘기엔 전혀 공감을 못했지만, 적어도 엄마에겐 소중한 추억이라는 데는 어느 정도 동의하는 듯했다.
식탁도 그릇도 없어서 일회용 그릇에 대충 담아 바닥에 늘어놓고 앉아 먹던 때도 누룽지까지 챙겨 먹을 정도로 집밥에 진심이었다.
정착 초기에는 힘들었던 게 하루종일 돌아다니다 돌아와 몸이 천근만근인데도 집에 돌아오자마자 냄비에 쌀을 안쳐서 저녁을 해 먹어야 했던 거였다.
한국이었다면 전화 한 통에 온갖 산해진미가 배달되었을 텐데...
제법 구색을 갖춘 그릇들과 반찬통이 생기면서 밑반찬을 만들고 국이나 찌개를 끓이는 본격적인 한식생활이 시작되었다.
H마트에는 비록 한 두 브랜드가 거의 독점하다시피 진열돼 있었지만 한국에서와 다름없는 식단을 유지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식재료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선택의 폭이 좁다는 것과 신선도의 측면에선 많이 아쉬웠지만 H마트가 없던 2~3년 전만 해도 아틀랜타까지 2시간을 운전해서 한인마트로 장을 보러 다녔다는 얘기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미국산 소고기가 한우보다 저렴한 건 워낙 생산량이 많아서 전반적으로 가격이 우리나라보다 낮고 미국소의 육질이 한우보다 못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미국사람들이 스테이크를 즐겨 먹고 스테이크가 유명한 것이 의아하기만 했다.
'고작 이 정도로 스테이크 운운하다니. 투뿔한우 스테이크를 맛보면 기절들 하겠네.'
하지만 미국 마트에 진열돼 있는 최상급 소고기는 투플러스 한우보다 비쌌고 육질이나 마블링 또한 최고였다.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게 그다지 좋은 등급의 고기가 아니어서 가격이 저렴했던 것이다.
생각보다 비싼 고깃값에 한껏 눈을 낮춰 고기등급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가장 쉽고 만만한 것이라 예산에 따라 등급을 조절해 가며 육식생활을 이어갔다.
고기만 좋아하던 식생활에 생긴 약간의 변화는 샐러드나 곁들이는 가니쉬를 예전보다 좀 더 챙기게 된 것이었다.
마트에 진열돼 있는 수많은 샐러드소스들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자기 취향껏 선택한 소스들은 아이들이 야채를 더 많이 먹는 계기가 되었다.
삼시 세끼를 집에서 먹다 보니 냉동실에 쟁여놓는 음식들이 많아졌다.
햄버거 패티나 미트볼은 한 번에 많이 만들어두면 아이들 도시락으로 싸줄 수도 있어서 만들 때마다 점점 양이 늘어났다.
밑반찬에 국이나 찌개를 챙겨 먹던 식단이 점점 커다란 앞접시에 자기가 먹을 만큼 덜어 먹는 한 그릇 음식으로 변화됐다.
한식만 고집하던 아이들도 점점 토마토케첩맛(?)이나 크림소스에 익숙해졌고, 자기가 먹고 싶은 만큼 덜어 먹는 게 오히려 재밌는지 한식을 먹을 때도 커다란 앞접시를 식판처럼 사용해서 반찬을 담기도 했다.
아침식사는 주로 토스트와 계란, 소시지로 간단하게 시작했는데 짜지 않은 소시지를 찾을 때까지 꽤 오래 걸렸다.
소시지나 햄을 살 때 한 번도 성분표를 보고 산 적이 없었는데, 처음에 아무 생각 없이 카트에 담은 소시지가 엄청나게 짠 것을 알고는 그다음부터는 꼭 소듐 함량을 체크했다.
마트마다 굉장히 다양한 육가공제품들이 있었지만 우리에겐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체로 어찌나 짠지 물에 한참을 끓여도 짠기가 빠지지 않고, 볶음밥에 전혀 간을 하지 않고 소시지만 넣고 볶아도 짜서 못 먹을 정도였다.
그나마 가장 낮은 소듐 함량의 소시지와 베이컨 역시 우리 입맛엔 짰지만 그래도 먹다 보니 어느새 그 짠맛에 적응되었다.
육질이 어떻고 맛이 어떻고 하기 전에 '얼마나 안 짠가?'가 선택의 최우선 조건이 되었다.
잔치국수, 칼국수, 우동, 쌀국수 같은 면요리는 가장 만만한 점심식단이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멸치다시와 국간장 덕분에 변함없는 국물맛을 맛볼 수 있었기에 음식으로 인한 향수병이 없었던 것 같다.
스파게티는 라면만큼 쉽고 간단한 데다가 브랜드별로 다양한 소스들은 다 먹어보지 못하고 돌아갈 정도로 선택지가 다양했다.
워낙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살다 보니 세계 각국의 식재료들을 너무나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건 미국생활의 큰 재미 중 하나임이 분명했다.
아무리 잘 먹고 지내도 가끔 라면이 당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한인마트에 갈 때면 라면을 하나씩 사 오곤 했는데, 왠지 한국에서 먹던 맛과 좀 달랐다.
신라면조차도 덜 맵고 느끼하다고 해야 하나?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차이가 느껴지는 게 우리 입맛이 변한 건지 수출용이라 좀 다른 건지 모르겠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오히려 더 한국이 그리워지는 라면맛이었다.
우리에겐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일이었지만 한국은 추석 연휴라는 얘기에 갑자기 잡채가 먹고 싶어졌다.
명절이나 제사 때마다 늘 상에 올라왔지만 손도 안 댔었는데 명절음식을 떠올리자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잡채였다.
한 끼 먹을 정도만 조금 만들었더니 아이들이 너무 잘 먹어서 금세 접시가 비워졌다.
금방 만든 잡채가 제일 맛있다는 걸 알아버린 아이들은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도 잡채를 만들 때면 쪼르르 다가와서 한 움큼씩 덜어가곤 정작 상에 올라온 건 이미 그 탱글함이 사라졌다며 손도 대지 않았다.
날씨가 조금씩 쌀쌀해지면서 따끈한 국물의 각종 탕들이 생각났다.
설렁탕, 곰탕, 소머리국밥, 안동국밥, 순댓국, 해장국, 내장탕...
옛날에 어떤 한국 유학생이 정육점에서 버리려는 뼈들을 얻어다가 사골국을 잔뜩 끓여서 유학생활 내내 밥을 너무 잘 먹고 다녔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땐 그 얘기를 들으며 "그래, 미국사람들이 먹지 않는 식재료라 미국에선 사골뼈가 진짜 싸겠구나."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옛날얘기인지 아니면 미국에 사는 동양인들이 그새 많이 늘어서 그런지, 생각했던 것만큼 사골값이 저렴하진 않았다.
사골을 파는 마트가 중국마트밖에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큰맘 먹고 사 온 사골을 하룻밤동안 핏물을 빼고 그나마 가장 큰 냄비에 넣고 팔팔 끓여서 식힌 후 페트병에 3분의 1씩 나누어 담았다.
다시 물을 붓고 푹 끓여낸 2차 사골을 식혀서 병에 나누어 담고 3차까지 반복한 끝에 드디어 사골육수 세병이 생겼다.
커다란 들통이나 곰솥이 없었기 때문에 식히고 기름을 걷어내는 과정이 더 번거로웠지만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육수병을 볼 때 마나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이제 한동안 각종 탕들을 원 없이 먹을 수 있다.'
하지만 H마트에서 뽀얗게 우려낸 사골국을 페트병에 담아 팔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약간의 MSG도 첨가됐는지 왠지 내가 끓인 것보다 더 맛있게 느껴져서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엔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그냥 쭈욱 사다 먹기로 했다.
분식이 너무너무 먹고 싶은 날이면 H마트에 가서 떡볶이 떡과 꼬치어묵, 그리고 냉동만두를 사 왔다.
한국의 그 맛과 똑같을 순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한 번씩 분식파티를 하는 것만으로도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달래졌다.
비비고에서 나온 냉동만두 중 고수가 들어간 제품이 있었는데, 한국제품인데도 미국시장을 겨냥해서 따로 만든 제품이 있다는 게 재밌었다.
매일 반복되는 비슷비슷한 식단들이었지만 향신료 하나, 소스 하나만으로도 훨씬 다양한 경험이 가능했던 시간들이었다.
ESL에서 만난 여러 나라의 친구들은 자기 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맛있는 소스들을 소개해줬고, 일반 마트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은 아마존에서 주문하는 방법까지 공유하며 또 다른 식도락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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