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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체험학습인가요? 여행인가요? - 워싱턴D.C. 여행기
    미국에서 1년 살기 2023. 12. 20. 08:50

    금요일 오후, 모두의 수업이 끝나고 나의 ESL 레벨테스트까지 마친 후 우리는 곧바로 워싱턴으로 출발했다. 

    노동절인 월요일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연휴라 3박 4일의 워싱턴 여행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5시간 정도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고도 남았는데, 미국에 오니 2~3시간 정도는 가볍게 마트에 다녀오거나 외식을 하고 돌아오는 거리가 되었다. 

    한 달 동안 매일 여기저기 운전을 하며 다녔기 때문에 새 차엔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이렇게 주 경계 너머까지 멀리 이동하는 건 처음이라 살짝 긴장이 돼서 미리 지도를 보며 대략적인 길을 익혔다.

    미국에 와서 우리가 사용하는 내비게이션은 Waze라는 애플리케이션이었는데, 처음엔 영어로 나오는 안내들이 귀에 익지 않아 화면의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았다.

    이제는 '턴 레프트'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좌회전을 준비하는 정도는 됐지만, 그래도 여전히 영어로 나오는 안내가 어색했다.

    그래도 이 앱 덕분에 중고거래할 때 처음 가는 곳도 쉽게 찾아갈 수 있었고, 정보업데이트도 꽤 잘 돼서 막히는 길을 우회하거나 사고지점을 피할 수 있게 안내해 주는 게 신기했다.

    국도나 고속도로를 달려보니 운전자들끼리 도로파손 구간이나 경찰의 위치까지 공유해서 네이게이션에 주의알림이 뜨면 잠시 후에 도로 한쪽에 낙석이 나뒹굴고 있거나 우거진 나무 밑에 경찰차가 숨어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출발하며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설정하니 예상 소요시간이 5시간 정도로 나왔다.

    하지만 한국이나 미국이나 연휴에 맞춰 여행을 하는 건 마찬가지인 듯 워싱턴에 가까워질수록 차들이 늘어나고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내비게이션의 도착예상시간은 계속 늦어졌고 밤 10시가 돼서야 우리는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늦은 저녁식사를 마친 후 내일부터 시작될 본격적인 관광을 위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비록 워싱턴에 머무는 건 3박 4일이지만 워싱턴에 도착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을 빼면 하루종일 온전히 관광을 할 수 있는 날은 이틀뿐이라 최대한 많은 걸 하고 돌아올 생각에 빡빡한 일정을 계획해 두었다.

     

    주말 워싱턴 시내는 관공서나 회사들이 거의 문을 닫기 때문에 아주 한가할 거라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긴 연휴를 맞아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붐볐다.

    애초에 검색해 뒀던 자연사박물관 근처의 무료 주차장은 이미 꽉 찼고, 길가엔 푸드트럭들이 길게 늘어서 있어 주차할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결국 Waze앱에서 주변 주차장을 검색해서 박물관 건너편의 건물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비록 무료는 아니었지만 휴일엔 하루 주차비가 10불 정도라 나쁘지 않은 가격이었다.

    오늘 가려는 곳들은 모두 자연사박물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들이라 하루종일 걸어서 왔다 갔다 할 계획이었다.

     

     

     

    박물관 오픈 전인데도 박물관 입구 앞엔 사람들이 이미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언제 들어가나 싶었는데, 푸드트럭들의 메뉴판을 구경하며 사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 보니 금세 입장할 차례가 되었다.

     

     

     

    간단한 소지품 검사 후 들어간 자연사 박물관의 규모는 생각보다 훨씬 더 컸다.

    NC 생명과학 박물관이나 그린스보로 과학센터는 넓은 대지에 쫙 펼쳐져 있는 느낌이었다면, 도시 한복판에 있는 워싱턴 자연사박물관은 웅장한 건물 자체만으로도 그 규모가 느껴졌다.

    과연 단 몇 시간 만에 다 돌아볼 수 있을까? 마음이 급했던 나와는 달리 아이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동안 갔었던 곳들이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아기자기하게 구성되어 있었던 것과 달리, 자연사박물관의 좀 더 전문적이고 자세한 설명들이 아이들에겐 좀 어려웠나 보다.

    박물관에 급을 매기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가 훨씬 더 유명한데...

     

     

     

    박물관이 워낙 넓고 사람도 많아서 어차피 아이들과 함께 하나하나 꼼꼼하게 관람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전부 다 보고 가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아이들이 재미있어할 만한 체험들을 중심으로 박물관을 돌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재미있어했던 체험 중에 자기 얼굴을 유인원 얼굴과 합성해 주는 게 있었는데, 다들 결과물로 출력된 원숭이인 듯 원숭이 아닌 서로의 얼굴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둘째 아이는 광물 전시실의 수많은 반짝거리는 예쁜 돌들(?)과 사랑에 빠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아이들이 새로운 관심사를 발견하고 좋아할 때가 있다.

    나와 너무 다르고 아이 둘마저 서로 너무나 다른 각자의 그 취향이 참 신기하다.

    나중에 커서 여기 있는 예쁜 돌들을 다 살 거라고 했으니 부디 그 목표를 이루길 바랄 뿐이다.

     

     

     

    수많은 전시실을 뒤로하고 아이들에게 가장 즐거운 곳은 역시 기념품샵이었다.

    색색의 다양한 광물들의 사진만 수십 장씩 찍으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던 둘째 아이는 결국 기념품샵에서 파는 작은 광물조각들을 사고야 말았다.

    작은 주머니에 자기가 원하는 색의 돌들을 신중하게 골라 담는 내내 얼마나 좋아하던지, 자연사박물관에서 얻은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첫날은 그렇게 덥지 않아서 걸어 다니기에 딱 좋았지만, 아침 일찍부터 박물관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닌 아이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자연사박물관 앞의 공원 주변엔 다양한 박물관들과 미술관들이 있었지만 아이들에겐 공원벤치에 앉아 쉬다가 우연히 만난 다람쥐가 오히려 더 신기하고 재밌었고 나머지는 그저 다리 아프게 돌아다녀야 하는 지루한 건물들일뿐이었다.

    부지런히 돌아다녀서 오늘 하루동안 적어도 3~4개의 박물관은 봐야 한다는 계획이 다 부질없는 나의 욕심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이왕 온 거 딱 한 곳만 더 가보자고 아이들을 살살 달래며 들어간 항공우주박물관은 다행히 아이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아이들 위주의 체험공간들이 가득하고 직접 해보는 활동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안에서만 하루종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며 자연사박물관 전체를 훑고 다니느라 지친 남편과 나의 체력은 이미 방전되었지만 아이들은 오히려 더 쌩쌩해진 것 같았다.

    체험 하나하나 그냥 지나치지 않고 긴 줄을 서 가면서까지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차라리 진작 여기에 왔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운영마감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게 아쉬웠다.

    그래도 아이들이 오늘 하루를 '재밌었다'는 기억으로 마무리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다음날은 차로 이동하며 워싱턴 곳곳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주미대한제국 공사관이었는데 건물 앞에 걸려있는 커다란 태극기를 보니 왠지 마음이 뭉클해졌다.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지 방문자가 우리 가족밖에 없었고, 따로 해설을 들으며 여유 있게 둘러볼 수 있었다.

     

     

     

    마치 영화세트장 같은 공사관 내부는 소품 하나하나가 너무 예쁘고 고급스러워서 보는 것만으로도 대리만족이 느껴졌다.

    제대로 된 가구 하나 없는 미니멀리즘 생활을 하다 보니 과할 정도의 화려한 장식들과 무늬들이 더 예뻐 보였다.

    각 장소들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그 당시에 이렇게 생활했겠구나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나와는 달리, 아이들은 무슨 모델하우스에 따라온 것 마냥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옛날에 우리나라를 대표해서 미국에 있었던 분이 계셨던 곳 이래. 진짜 신기하지?"

    "우리 점심 뭐 먹어요?"

    그래, 뭔가를 기대하며 데리고 다니는 내가 잘못이지. 마음을 비우자.

     

     

     

    공사관을 나서기 전에 방명록을 남기며 잠시 반짝였던 아이들의 관심은 금세 사그라들었고, 링컨기념관으로 이동하는 동안 불만은 점점 쌓여갔다.

    어제보다 더운 날씨에 공원을 걷는 것조차 더웠는데, 링컨기념관으로 올라가는 긴 계단을 보고는 아이들의 불평이 시작됐다.

    사람들의 행렬에 떠밀려 긴 계단을 다 올라간 아이들은 달랑 링컨 동상 하나뿐인 기념관의 모습에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나마 첫째 아이는 책에서 봤던 거라고 기념사진도 찍고 뭔가 설명을 읽어보려는 모습이라도 보이는데, 둘째 아이는 그저 덥고 지쳤는지 배고프다며 징징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직접 눈으로 보면 느끼는 게 많을 거라는 건 순전히 나의 착각이었다.

    이 모든 게 신기하고 재밌는 건 나와 남편뿐이었고, 5학년인 첫째 아이는 그나마 좀 아는 거라 잠시 잠깐 흥미를 보이기도 했지만 1학년인 둘째 아이는 과연 이번 여행을 기억이나 할까 의문이었다.

     

     

     

    이제 점심 먹으러 가자는 말에 아이들은 가장 기쁘고 적극적인 기념사진포즈를 취해주었다.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씁쓸한 건 왜일까?

    점심을 먹을 겸 잠시 들린 유니온마켓은 오래된 동네를 개조해서 다양한 메뉴의 음식점들을 모아놓은, 마치 우리나라로 치면 성수동과 같은 힙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오래된 관광지가 아니라 새롭게 뜨는 핫플레이스인 만큼 관광객보다는 데이트하는 젊은이들이 많았고, 낡은 건물과 대비되는 생기발랄한 분위기가 이전의 관광지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각자 자기 취향대로 메뉴를 고르면서 혹시나 아이들이 자기 음식은 스스로 주문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여전히 나만 바라보고 있을 뿐 영어를 쓰는 일은 없었다.

    미국에 온 지 한 달이나 됐으니 이쯤 되면 영어로 간단히 주문하는 모습 정도는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이것조차 나의 욕심이었나 보다.

    생각해 보니 한국에서조차 자기가 주문해 본 적 없는 아이들이 미국에 왔다고 갑자기 막 용기가 생길리는 없는데 말이다.

     

     

     

    유명하다는 아이스크림까지 후식으로 든든하게 챙겨 먹고 한껏 기분이 좋아진 아이들은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뮤지엄에 들려볼까?라는 제안에 의외로 순순히 응해줬다.

    막연하게 유대인의 아픈 역사가 담겨있는 곳이라는 생각으로 간 홀로코스트 박물관은 생각보다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 스토리를 따라 관람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울컥하며 기분이 가라앉았다.

    어두컴컴한 실내가 무섭기만 한 둘째 아이와 달리 첫째 아이는 뭔가 느껴지는 게 있는지 관람 도중에 눈물을 글썽였다.

    일제치하에 있던 우리나라도 꼭 이와 같은 핍박과 고통을 받았을 거란 생각에 더욱 깊이 공감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돈이 많아서 이런 박물관을 미국의 중심지에 세울 수 있었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할 수 있기에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의 편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좀 부러웠다.

    비주류의 민족으로 타국에서 지내보니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에도 국력에 따라 느껴지는 자신감이랄까? 그런 게 있는 것 같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BTS의 노래만으로도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고 왠지 모를 뿌듯함마저 느껴지는 게 '알려진다'는 게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갖는지.

    어제나 오늘이나 마음을 비우고 가볍게 찾은 곳에서 오히려 더 많은 걸 얻고 가는 느낌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면서 아쉬운 마음에 백악관 근처를 빙빙 돌며 시내를 구경했다.

    백악관 앞까지 걸어가면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지만, 지나치며 슬쩍 본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아이들에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싶어 시내 드라이브로 마음을 달랬다.

     

     

     

    애초의 계획만큼 많은 곳에 가 보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이 이상 무리하게 돌아다녔다면 아이들뿐만 아니라 나도 즐겁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여행지가 워싱턴 D.C.라서 뭔가 교육적인걸 많이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더 컸던 것 같기도 하다.

    과연 교육적인 게 무엇인지, 뭘 배우고 느껴야만 교육적인 건지 다시 생각해 보았다.

    앞으로도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선 나의 속도에서 한 템포 늦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경험하게 되는 것을 좀 더 여유 있게 즐기고 각자의 취향을 발견해 나가면 된다며 스스로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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